한 칼에 대한 환상
요즘 남북문제는 피곤한 일상에 불안감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불안한 행보를 하고 있다. 북한 핵실험 이후 정부에 의한 민간단체들의 대북지원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고, 6월 이후 대북물자지원 및 북한 방문 제한으로 민간단체들의 인도적 사업이 차질을 빚는 가운데서도 현정은 회장의 방북과 조문특사의 방남은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간 것 같다. 사회문화 교류 역시 정치적 현안에 밀려 명분조차 찾기 힘들어 보인다. 11월에 있었던 서해교전은 남북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당분간 찬바람만큼 냉랭한 남북관계가 될 것이 분명하다해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문화 교류’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남북교류를 추진했던 민간단체들도 숨을 죽이고 국면이 전환될 때를 기다리는 양상이다. 남북관계가 야기하는 불안감과 불안정은 남북문제 자체를 피곤하게 만든다. 이 피곤함이 통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축적되고, 정치적 냉소로 악순환 될 것이다.
대북 퍼주기는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북한의 변화 없이는 남북관계 개선도 없다’는 입장은 너럭바위처럼 단단해 보인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장은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하였다.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이 북한에 있으니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스스로 변화하여 나올 때까지 힘들겠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다는 입장도 단호하다. 대북압박 정책이 효과를 거두어서 대화하자고 나왔으니 조금 더 기다리면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어 보인다.
물론 정부에서도 마냥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여러 차례 표명하였으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일괄 타결’ 방식으로 제시한 ‘그랜드 바겐’을 제시하기도 했다. ‘북핵만 해결되면 안전을 보장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구상은 정치적 효과가 분명하고 통 크게 보인다. ‘이왕하는 거 화끈하게 하자’는 스케일 큰 방식의 협상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상전략으로서 효용가치는 의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랜드 바겐’으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북핵 문제를 쾌도난마(快刀亂麻), 한 칼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랜드 바겐’은 ‘핵을 팔아 안전을 사고, 쌀을 지원받는 것’이다. ‘핵을 팔아서 안전과 경제지원을 보장받았다’고 인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명분이 없다.
설령 북한이 ‘그랜드 바겐’을 수용한다고 해도 우리가 상응하는 안전조치와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을까? 쌀과 비료를 예년 수준으로 제공하는 것 플러스 알파 이상의 지원이 가능할 수 있을까? 설령 북핵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재래식 무기 감축을 비롯한 군사문제, 인권문제 등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을까?
북핵문제는 하나씩 따져가며 확인하고 검증하면서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6차 방정식이자 다국어로 쓰여진 난해한 원서이다. 무 자르듯이 한 칼에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설령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이 ‘북핵 폐기’를 선언했다고 해도 이를 검증하고, 절차를 밟는 과정은 멀고도 긴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두 차례나 경험했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폐기할 것이며, 그때마다 어떤 절차를 거쳐 검증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핵 폐기에 대응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해서도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제공할 것인지를 논의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그랜드 바겐’을 추구하는 것은 ‘한 칼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이른바 큰 것 한 방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고, 지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유혹은 정치인으로서는 떨치기 힘든 매력적인 카드이다. 남북관계 경색국면에서도 한편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론되면서 은밀하게 남북이 만났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2010년에는 정상회담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시기적으로 2010년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의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시기이다. 2010년이면 취임 중반을 넘어서고, 지방자치제 선거도 있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 말 정상회담 추진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했던 한나라당으로서는 2010년 이후 남북정상 회담은 명분도 없어 보인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안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MB정부 이후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자칫 2000년 이후 남북정상 회담을 하지 않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이래저래 명분과 실리의 사이에서 입장과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다. 지도자의 선택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미래도 달라진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역사를 인식하는 자리이기에 대통령의 선택은 항상 역사적 선택이 되는 것이다.
전영선(흥민통 정책위원)